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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사이트 2025. 10. 17.(금) 큐티인 새벽 큐티 설교(우리들교회 신승윤 목사 설교) ※ 새벽 큐티 싸이트 ※ 오늘의 찬송 195장, 성령이여 우리 찬송 부를 때 녹취 : 신범석 우리를 도우라(사도행전 16:6-15) 큐티인과 함께하는 새벽 큐티 설교 시간입니다.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 아버지 하나님, 내 힘과 나의 지혜와 능력이 아닌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성령의 직행을 하길 원합니다.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Amen. 말씀 준비하면서 한번 생각을 해봤거든요. 여러분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오시면서 누군가를 좀 도와주신 적이 많은 것 같아요? 아니면 반대로 좀 도움을 받으신 적이 많은 것 같아요? 어떠십니까? 누군가를 도와준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참 많습니다. 회심한 후에 감히 제가 이렇게 이 자리에 서기까지 참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제가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잖아요. 그러면 이제는 저도 누군가를 좀 돕는 사람이 돼야 될 텐데 저는 도움받는 것이 익숙해질수록 점점 대우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누군가 제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도움이 있잖아요. 그런 어떤 반응, 그런 것들을 없고 도움도 없으면은 오히려 제가 비난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해요. 안 그런 척하는데 어딜 가든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가기 전에 생각을 하잖아요. 그 어떤 모임이나 아니면 어떤 개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거기에 따라서 때로는 막 담대해져요. 어떤 말을 해도 될 것 같고, 내 말을 다 수용할 것 같고, 그러면 용감해지죠. 때로는 저분들이 혹은 저 대상이 나에 대해서 별로 반응이 안 좋을 거야라고 생각을 하면 소심해집니다. 그래서 잘해 주고 친절한 분, 익숙한 분과 교제하며 사역하는 것이 참 좋아요. 좋은 것이 좋은 거지 뭐 이거까지 죄라고 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진짜 죄는요, 제가 불편한 감정을 느끼거나 누군가에게 저 사람은 참 이상해 아니야라는 말을 제가 미리 듣거나 하면 제가 그냥 지레 판단하고 멀리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주신 분명한 사명이 있잖아요.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구원에 대한 그 사명, 전도에 대한 사명 그리고 한 사람의 구원이라는 중대한 토토사이트 문제도 저의 판단 그리고 저의 선호나 기호 그 밑에 둡니다. 왜 나는 온통 모든 기준이 나인가? 나에게 도움을 주면 좋은 사람, 해를 끼치면 나쁜 사람으로 보는가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성령의 도움보다 사람의 도움을 구하면서 그것만 갈구하기 때문이 것이 일원론이잖아요. 신앙이 성장하는 이유, 성장하지 않는 이유, 나의 신앙이 그 자리인 이유, 그리고 예수를 믿은 지 세월이 오래될수록 분명히 오래된 것 같은데, 열매가 없는 이유, 그리고 고난이나 관계나 우리가 살면서 적지 않게 당하는 그런 어려움들 앞에서 어김없이 주저앉는 이유는 교회 다니지만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본 그 경험이 없거나 성령보다 사람의 도움과 해결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비교적 사역의 초기라 할 수 있는 1차 전도 여행을 마친 후에 2차 전도 여행 그 시작 지점에 바울이 받았던 성령의 도우심과 그 인도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신 말씀을 통해 성령의 도우심은 누구에게 그리고 또 어떻게 임하는지 함께 묵상하며 적용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려면 첫째,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멈춰야 됩니다. 막으심으로 도우시는 것이죠.바로 앞 5절이죠. 어제 보면 5절은 이렇게 끝나요. 아주 희망적으로 끝나요. 교회의 믿음이 굳건해지고 수가 더 늘어가니라. 그럼 어떻게 됩니까? 이제 뻗어나가야 되죠. 확장이 돼야 됩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이 확장,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 헌신하고 애쓰고 온몸을 불사르는 그 바울에게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세요. 7절에서는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는다 하십니다. 거짓도 아니에요. 내 자랑도 아니에요. 복음인데 막으십니다. 6절에 기록된 아시아 있잖아요. 바울이 아시아로 가고자 힘쓰기 할 때 그 아시아는 오늘날 우리나라가 속한 그리고 뭐 중국, 일본 등이 있는 이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터키 지역입니다. 아주 광활하고요. 지역이 넓은 지역이에요. 그리고 에베소 같은 유력한 도시들이 있고 유대인의 해당도 있는 그리고 활기차고 또 희망찬 도시들 그리고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유력한 도시들이 많아서 당연히 그쪽을 시작으로 점차 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성령이 막으셨다고 해요. 성령은 누구십니까? 내가 알지 못한 것을 깨닫게 하시는 영이죠. 6절에 성령이 막으시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하려면요. 먼저 지금 여행길에 오르는 함께 오르는 동역자들이 누구인가 바울과 함께 오르는 동역자들이 누구인가를 먼저 봐야 됩니다. 일단은 오직 복음에 대한 열정 그거 하나만으로 나는 어디든 가리라 복음을 전하러 온몸을 불사리라 다짐하면서 떠나는 바울이 있죠. 그리고 그 옆에는요, 예루살렘 교회에서 막 파송을 받아서요. 함께 가는 초보 선교사 실라 실라가 있어요. 그리고 또 유대인과 헬라인의 혼혈로 태어나서 어머니의 믿음은 받았어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성품은 있었지만 박해를 경험한 적이 없는 어린 청년 디모데가 있습니다. 많은 고생을 했던 바울에 비해서 이 둘은 어때요? 뭔가 겪은 것이 없죠. 만약 이 모습 그대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아시아 그쪽으로 가서 바울이 겪었던 그 고통을 고난을 박해를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해보세요. 혹은 반대로 정말 자신이 경험하고 본 적 없던 화려한 도시들, 삐까뻔쩍한 그런 시설들 사람들 앞에서 거기에 눈과 마음이 뺏겨버린다면은 우리가 앞서 전도 여행길을 벗어났던 마가와 같이 돌아가거나 포기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바울은 이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연약하지만 내가 함께 가야 할 사람에 대한 배려를 깨닫지 못한 바울이었기에 토토사이트 이것을 성령이 아시고 막으세요. 그리고 훗날 이들이 더욱 강건해진 3차 전도여행 때 바울은 아시아의 에베소 그곳에 2년간 머물며 복음을 전하죠. 이제 성령에 전하지 못하게 하신 대로 바울은 순종합니다. 순종해서 아시아 진영을 떠나요. 그리고 2차로 작정하는 게 뭐냐 하면 지금 떠나는 출발지를 기준으로 그 아시아가 남쪽에 있다면 이제는 목적지는 난 북쪽이야 본토를 향해 갈 거야. 엄청난 도시들이 마찬가지로 있었어요. 그 북쪽으로 행로를 정하고 이제 나는 거기서 복음의 씨앗을 전파하리라 하는 다짐으로 다시금 북쪽으로 가기를 결심합니다. 그런데 그때 또 7절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놀랍지 않으세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도 허락하지 않으시는 이유. 그것은 바울과 저와 우리 성노님들의 복음 전파하는 그 길, 그 여정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먼저 깨닫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회심 후 진리 복음에 대한 진리를 알고 감격하게 된 그 진리에 너무 감격하게 된 바울은 회심 전에 자신이 그렇게도 예수님을 거절하고 핍박했던 것이 비로소 생각났을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이 직접 거절하시는 그 사건 앞에서요. 거절당하실 이유가 전혀 없어요. 우리 예수님이, 그런데 그렇게도 모질고 질긴 나의 거절을 예수님이 참아내고 기다려주시고 받아주셨던 것을 생각하면서 비로소 그 예수에 거절하심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확신과 열정과 노력과 계획 모두를 내려놓고 그 허락하지 않으심에 일절 순종합니다. 예수님 아니라고요, 북쪽 큰 도시 니케아로 가야 됩니다. 이것이 제가 해야 될 일이고 예수님의 이름이 저나 널리 퍼지는 방법입니다. 반론하지 않아요. 이 예수님의 거절을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잘 받아낸 바울은 이후 사람들의 숱한 거절에도 끝까지 나의 사명을 향해 달려갑니다. 내가 배려하며 돌아보지 못하는 것이 있기에 성령께서 막으세요. 그리고 먼저 내 죄를 보고 순종하는 훈련이 이 복음 전파의 사명의 길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의 영이 우리 예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늘 말씀에 물으며 내 죄를 돌아보지 않으면 나의 계획과 열정과 옳고 그름이 그리고 그 끝에는 사람의 인적만 구하는 나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만 남은 나만 남아 있습니다. 30대 늦깍이에 늦게 회심을 했어요. 남은 인생 하나님을 위해 살리라 다짐을 합니다. 그런데 저의 이 열정 뒤에는요. 돈이나 구걸하던 인생, 손가락질 받던 인생, 중독으로 실패한 인생, 이제는 좀 칭찬도 받고 대우도 받고 사랑도 받는 인생, 되어보자는 좀 상등급의 욕심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습니다. 이전처럼 불안하지 불안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따라만 가는 아내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장인도 장모님도 아내도 믿지 않는 가정이지만 제 가족이 되었잖아요. 처음 목회자가 되고 수행 수련 학업의 길로 들어섰을 때 부산의 대형 교회에서 인맥으로 이렇게 사역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아시는 유명한 교회입니다.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내가 이렇게 돼야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혼하신 장인어른이 제가 이렇게 거기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그 교회 아는 장로와 집사가 많다고 하시는 거예요. 당시 골프 연습장을 하셨거든요. 그 교회 인근이라 많은 고객이 그 교회분이라는 말을 듣고 혹시나 목사가 목사가 돼야 될 사람이 이런저런 집이랑 결혼했다는 소문이 날까 봐 지원서도 내지 않고 고사했습니다. 토토사이트 그런데 왜 왜 있잖아? 왜 이 질문을 말씀에 묻지 않고 처가에 던졌습니다. 그래서 왜 이런 가정의 나를 이 분노가 멈추지를 않는 거예요? 이후에 홀로 되신 장모님이 의논 없이 저희 신혼집 위해 이사를 오셨는데 그것이 너무 불편해요. 답답해요. 그래서 신학 공부를 핑계로 서울로 혼자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음대로 자유를 누리죠, 누리면서 거룩하고 진실한 척하면서 신학생들과 어울려서 놀았습니다. 그러다 한 교회에서 실시한 신학생 양성 프로그램이 지원했는데 지원자 가운데 면접과 시험 여러 개 과정이 있는데, 그걸 거쳐서 최종 명단에 올라갔습니다. 희한하게 붙는 건 참 잘 붙는 것 같아요. 합격하면은 학비는 물론 일정 사례도 주고 도서비도 주고 입학을 하게 되면은 소명에 따라 전도사 사역도 할 수 있게 하고 졸업 후에 선교사 파손까지 이렇게 보장이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최종 합격자, 최종 예비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담임 목사님 면접이 있는데, 그때 결혼한 경우에 아내 아내의 실력, 아내 가정의 실력, 실력 아시죠? 그 가정의 직분은 뭐고 이런 것들인데 그거를 참고용으로 제출하라는 걸 통보받고 바로 그 지원을 포기했습니다. 여러분 제 마음이 어땠을까요? 내 길이 이렇게 막히다니 이 생각만 하니까 치가 떨리고 하나님 그냥 나 그냥 살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지, 왜 날 데려와서 이 망신을 당하게 하고 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고 이 좌절을 겪게 하시냐고 매일 원망했습니다. 그 아내를 남보다 못하게 여기고 처가를 집구석이라고 칭하면서 지옥을 살았습니다. 이번 주일 말씀에 지옥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머무는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이제 다 막혔다고 생각하니까 이 좌절과 원망에서 벗어날 줄을 모르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만약 그때요. 그때 막으시는 사건 가운데 이것을 깨달았다면 어땠을까요? 가정이 온전하지 못하면 사역도 떳떳하지 못하겠구나. 그렇다면 우선 내 가정에 구원받아야 할 분은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짧은 고민을 당시에 못 했어요. 그래서 연약한 사람들 구원이 필요한 처가와 중간에서 눈치 보며 미안해할 아내 모두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저 내가 원하던 것 하나 거절 당하면은 온몸으로 부정하고 저주하면서 주변 사람을 무시하고 하나님마저 원망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끝에 저를 무슨무슨 님이라고 대부분 불러주시잖아요. 그 호칭받음을 기뻐하며 대우를 당연하게 여깁니다. 결국 끝에는 내가 존중과 대우받는 자리에 못 가니까 그렇게 발광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구원에 무관심하고 사명을 모르기 위해 우리들교회를 만나서 저를 직면하게 해주시는 교만과 위선으로 최고의 상급인 치리를 받았습니다. 저는 관증이라 하기에는 부끄러운 이 치리의 간증을 띵크 목회 세미나에서 매번 하고 있습니다. 10회 세미나까지 20번 했으니까 다음 주에는 21번째 합니다. 요즘은 가끔 원정도 나가요. 처음에는 그냥 하라니까 했는데 저는 거기서 각자 포지션이 있는데, 저는 웃겨야 되는 포지션이거든요. 그런데 점점 할수록 눈물이 나요. 내가 좀 이제 알게 되었잖아요. 알면서도 이 모양 이꼴인데 이 교만과 패역함을 모르고 목살하며 살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너무나도 제 자신이 절망이 되고 있을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 원인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은 그런 막아주심 허락하지 않으심 경험하게 하실 때는 우리 하나님의 계획과 성령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 삼위께서 함께하시는 분명한 이유와 계획이 있음을 믿습니다. 작은 것 하나 건드려졌다고 막히고 거절당했다며 울분을 토하시고 분노로 지옥에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를 토토사이트 통해 미처 보지 못했던 내 주위를 돌아보며 수없이 거절했던 나의 죄를 참아내신 예수님의 순종과 인내를 배워가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묵상하며 적용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옳다고 확신하며 잘 풀리리라 믿었던 것이 막혔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을 거절했던 나를 기억하며 순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끝까지 꺾지 않고 강행합니까? 성령의 도심을 받으려면 둘째, 한 영혼을 향해야 합니다. 어제 말씀도 오늘 말씀도 계속해서 한 영혼, 한 영혼이 이어지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거절에 순종하며 바울 일행은 작지만 번화한 항구 도시 드로아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바울은 유럽 선교의 초석을 넣는 놀라운 환상을 경험해요. 중요한 것 하나만 저희가 이때 잠깐 함께 보고 계속 이어가고 싶은데요. 9절에 보면 언제라고 합니까? 환상을 본 때가 밤입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 되나? 난 이제 막혔는데 어디로 가야 되나? 초짜 선교사들과 함께하느라 기댈 곳도 없었잖아요. 그랬던 바울입니다. 하지만 밤은 여전한 방식으로 언제나 그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때고 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은 바울을 찾아오십니다. 여러분, 우리 함께 생각해 볼까요? 여러분에게 밤은 어떤 시간이세요? 낮에 수고한 후 휴식의 시간. 취미나 습관대로 익숙하게 행하는 시간, 혼자 있고 싶은 시간 등 다양할 거예요. 하지만 이 밤을 하나님과의 교제 시간으로 누려보시면 좋겠습니다. 하루를 마감해며 잔잔히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시간은 지금껏 누리지 못했던 은혜를 부어주시는 때가 될 것입니다. 아울러 이 새벽에 이 밤이잖아요. 이 새벽에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소망하며 이 자리에 나오시고, 또한 어디에서든지 함께 예배하신 우리 성도님들께 이 밤에 말씀하시는 보여주시는 은혜와 감격을 허락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신학 공부를 할 때가 생각나요. 성경을 보고 또 보고 외우잖아요. 그 말씀이 어떤 문제가 나올지 모르니까, 그런데 너무 어려우니까 이렇게 외웠어요. 바울이 마게도니아 환상을 본 곳은 이런 문제가 있는데, 정답은 8절의 드로아인데요. 마게도니아 사람이 바울 보고 뭐라고 합니까? 들어와 들어와 이러잖아요. 이제 안 까먹겠죠. 드로아 섬입니다. 드로아라는 항구 도시인데요. 삼면이 바다라 더 이상 나갈 곳이 없는 지역이에요. 그런데 그 밤에 한 사람이 나타나 한 사람이 나타나 환상 가운데 바다를 건너 마게도네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앞에서 그곳을 건너면 복음이 필요한 곳, 고난을 당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에 인도하심입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경험을 넘어 역사하십니다. 먼 이방 지역 마게도냐에 무슨 믿는 사람이 있겠으며 그 헬라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어떤 복음이 들어갈까요? 말씀이 없고 우상이 가득하며 상식과 판단으로는 복음 전파가 불가능한 그곳에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 무리의 군대 환상을 보여주실 때 한 무리의 군대나 거룩한 한 성가대의 모임을 보여주셨다면 안 그래도 척박한 땅에 그래도 가고자 하는데 동기부여나 어떤 목적, 의식이 생겼을 텐데요. 오직 도움이 필요한 한 사람을 보여주세요. 어떤 의미일까요? 지금껏 바울은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지역 가능하면 더 멀리 편만하게 복음을 전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그런 가치관으로 전진하던 바울에게 이것은 충격이었습니다. 되도록 많은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잘못된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우선순위는 내가 먼저 받은 말씀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한 사람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의 길이 막히고 망망대해 앞에서 목적지를 찾지 토토사이트 못한 바울에게 주님은 한 사람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 때문에 내 행복이 막히고 내 삶이 무너지게 되었다며 원망하고 있는 대상이 있습니까? 마게도니아처럼 복음을 들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 불쌍한 삶이 안타까워 보이는 것이 우리 주님이 내게 환상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믿는 날을 무시하며 핍박하지만 나 몰라라 포기하며 정지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십자가의 타이밍을 노리시며 찾으시는 우리 성도님들의 힘든 전도 여행 가운데 성령께서 도우시며 동행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응원합니다. 내가 볼 때는 한 사람이죠. 그런데 그 한 사람을 보고 작정하며 길을 떠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요. 지금 바다잖아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런데 성령의 이끄심 따라 그 바다를 건널 때 그 척박한 이방의 땅에 어떤 교회가 세워지는지 아세요? 빌립보 고린도 데살로니가 주님의 몸된 교회가 곳곳에 세워집니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의 시작은 한 영혼이 지금 구원 때문에 흘리는 눈물과 참아내는 수치를 우리 주님 반드시 잊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10절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라라 이 말씀 붙잡고 배우자와 자녀 붙여주신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나가시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함께 묵상함에 적용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밤에 주로 뭐 하세요? 멈추어야 할 것, 그리고 이제는 더욱 집중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하십니까?10절의 말씀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하십니다. 성령의 도심을 받으려면 셋째, 그 마음을 열어 만나게 하십니다. 11절에 보면 환상을 보고 곧 마게도니아로의 길을 떠나는 그 여정이 이렇게 소개되고 있어요. 간략히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의 항구들을 이렇게 항구 도시들을 한 3가지 기록하고 있고요. 게다가 직행이라는 말까지 나오기 때문에 무난한 뱃길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길은 당시 범선으로 한 5일 닷새 정도 길인데요. 전문 항해사도 가능하면 피해요. 뱃길이 너무 험하고 어떤 침략을 당할지 몰라요. 너무 위험하고 어려운 길이라서 가지 않으려고 해요. 그런데 오직 하나님이 직행하게 하셨습니다. 험한 바닷바람, 해적의 침략 높은 파도는 성령이 함께하시는 그 길을 훼방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면은요. 저와 우리 여러분들의 삶이 항상 매일 지옥 같고, 고난의 연속이고 아픔과 질병 투성이었던 것은 아니었잖아요. 그렇죠?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을 주시고 이루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보세요. 본문에 나오는 항구들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다양한 볼거리, 즐길거리들이 되게 많은 곳이거든요. 그런데 그냥 이름만 나오고 쓱 지나가요. 머물고 싶은 곳이 있지만 스치듯 지나갑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 원래 목적지 마게도니아 여성 빌립보에 도착하고 나서야 11절 그곳에 수일을 머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순풍의 기쁨에는 감사할 수 있어야 됩니다. 당연하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계속 그것만 달라고 그것만 원하고 그 안에 머물려고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필요한 그 한 사람을 늘 생각하며 낮은 자리로 가서 구원을 위한 일에 집중하실 때 성령께서 도우시고 함께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고원을 위해 떠날 곳과 머물 곳을 분별한 바울 일행에게 드디어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당시 빌립보에는요.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어요. 그래서 바울은 안식 이래 여전한 방식으로 예배하며 기도하기 위한 곳을 찾습니다. 회당에 가지 못한 토토사이트 사람들 사람들은요. 당시에 손을 씻고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정결하게 해서 그 손을 씻기 위해 강가에 모여서 이렇게 성인 남성들이 함께 모여 기도했습니다. 이 습관을 따라 강으로 갑니다. 그리고 한 무리의 여인을 만나요. 13절에 보면 바울이 여자들에게 말을 하는데요. 무슨 말을 했을지는 추측해보지 않아도 너무나도 분명하죠. 박해자요, 핍박자 주님을 온몸으로 거절했던 나를 찾아오신 그 예수님 내가 살인자요, 비방자였는데 그 강권적으로 나를 만나주신 그 예수님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제사와 함과 구원받는 믿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나에게 임한 회개와 구원을 전했을 때 성령께서 한 여인의 마음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셔서 그 가정이 세례를 받고 바울 일행을 그 집에 머물도록 합니다. 청년부 사역을 오래 했습니다. 그러면서 청년들과 함께 많은 아울리치, 그러니까 요즘은 TT라고 하죠. 다녀왔습니다. 그때마다 청년들과 함께 사역교회 담임 목사님을 목회 세미나로 모시고자 하지만은 여의치 않을 때도 있고 또 가능한 곳도 많고요. 특히 기억에 남는 몇 분이 계세요.사역교회 수요예배에 인도하면서 우리는 늘 간증을 하잖아요. 저도 강단에 서서 도박 중독자였던 저의 과거와 목회자인 저희 집안이 사기를 당해서 빚더미에 앉았던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런데 그때 비로소 마음을 열어주시는 목사님이 계세요. 한 분은 설교 후에 조심스럽게 잠시 이렇게 밖에 아무도 없는 곳에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이렇게 하고 주위를 보시더니, 사실 지금 사모님께서 자신에게도 알리지 않고 투자를 하셨다가 사기를 당해서 빚더미에 앉았는데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지금은 빚을 갚기 위해서 두 분이 투잡을 하시는데 사모님이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지나가는 것만 봐도 너무 밉고 싫다고 하시는 거예요.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이 미움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너무 힘들어하시길래 두 분이 목세에 참석하실 것을 권했는데 아직 오지는 못하셨지만, 이렇게 목회자 세미난 때마다 매번 연락을 드리면, 꼭 오겠노라 해주십니다. 다른 한 분은 목회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아무도 모르게 이렇게 스포츠 토토로 풀고 계신다고 합니다. 시골 교회라서 보는 눈도 없고요. 천 원 단위 얼마 안 되는 소액이지만 그것만 하지만 이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또 자신이 너무 힘들고 양심 때문에 너무 힘들고 알게 된 사모님과 자녀와의 갈등도 크다고 하셔서 마찬가지로 목회세미나를 권했습니다. 두 분은 지방에서 목세 오셨고 양육은 사정상 받지 못하셨습니다.모두가 나이도 경험도 저보다 훨씬 아래고 저보다 훨씬 위이시고 그리고 훌륭하신 분들인데 훨씬 어리고 알지도 못하며 게다가 외지인인 저에게 솔직히 마음을 열어주신 것은 제가 뭘 어떻게 해서가 아니에요. 이 찌질하고 부끄러운 간증을 통해 주님이 그 마음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간증과 오픈에 대한 여러 의견이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죄 고백의 간증은 분명 죄로 인해 좌절하는 한 사람의 마음을 열리게 하고 결국 십자가의 복음을 열매 맺게 하는 아주 귀하고 좋은 씨앗임을 확신합니다. 왜 굳이 하냐? 필요가 있냐는 말과 온갖 오해를 받아 내시면서까지 나의 죄를 드러내며 이런 나를 죄밖에 없는 나를 찾아오신 주님을 간증해 주시는 공동체 지체들의 수고를 우리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공감을 하셨든 비난을 하셨든 우리에게 그 간증들은 나의 죄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열어 말씀으로 인도해 준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14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을 섬기지만 십자가와 제 삶을 몰랐기에 토토사이트 허무했던 그 마음에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보혈로 죄 씼음을 기념하는 세례를 루디아와 모든 가족이 받습니다. 그렇게 루디아의 가정에서 마게도니아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가 세워집니다. 때론 부끄럽고 수치스럽지만 벌거벗으신 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내가 박해자라 인정하고 고백하는 바울을 묵상하며 오직 구원을 위해 나의 죄와 연약함을 드러내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도우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한 죄 고백을 사용하시어 죄 가운데 무너지는 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신 그 귀한 사역을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겠습니다. 함께 묵상하며 적용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나에게 공동체는 어떤 의미입니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상대이며 상대는 누구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막히고 허락되지 않는 사건을 지금 겪고 있습니다. 열심히 한 만큼 원망이 되고 노력을 한 만큼 좌절하고 싶지만 인내한 만큼 너무 허무하지만 그럴수록 나의 거절에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신 예수님 기억하며 이때에 순종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삶의 기쁨이요. 목적이었기에 관계에 어려움을 당하고 배신과 어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구원을 인생의 목적으로 놓고 한 영혼을 위해 애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음이 얼마나 좋은지 알면서도 죄인인 나를 만나주신 주님을 증거하지 못해 가족과 붙여주신 사람의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치스럽다 하더라도 이 죄인을 만나주신 주님을 전할 때 그 마음이 열리는 역사를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소원하오며 이 모든 말씀 우리 구원이 되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성령의 거절 (6-7절)바울 일행은 아시아로 가서 복음 전파 사역을 계속 감당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시고 비두니아로 가려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잠 16:9).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열심과 계획이 아니라 주께 순종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길이 막히고 거절당하는 순간에도 우리를 더 나은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성령의 거절은 인도하심의 시작입니다.현재 막히고 거절당하는 내 상황이나 환경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인 것을 믿습니까? 곧 떠나기를 힘쓰니 (8-10절)드로아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사방이 막힌 바닷가에서 밤을 맞습니다.그 밤에 하나님은 바울에게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간청하는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여주시며 새로운 사명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의사 누가까지 합류한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결론 내리고 즉시 순종하여 떠나기를 힘씁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나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우리’ 안에서 부르심을 확증하게 하십니다.지금 내 인생에 찾아온 ‘밤’은 무엇입니까? 나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함께 의논할 ‘우리’가 있습니까? 그 마음을 열어 (11-15절)하나님은 바울 일행을 빌립보까지 순조롭게 인도하십니다. 그곳에서 바울 일행이 수일을 유하며 기도하자 주께서 자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말씀을 따르게 하십니다.그리고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구원받게 하십니다.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한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또한 그 가정과 공동체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나에게 말씀이 들려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 집이 열린 경험이 있습니까? 기도하기 제 계획과 뜻만 앞세우느라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는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막히고 거절당하는 환경 속에서 성령의 뜻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사방이 막힌 것 같은 인생의 밤에도 공동체와 함께 순종하여 주님의 제자를 세워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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